Menu

세례(침례)에 대한 13가지 반론과 답변

         어떤 교회들은 역사적으로 물에 잠기는 침례(immersion)가 구원받은 자와 잃어버린 자를 나누는 분기점이라고 가르쳐 왔습니다. 이는 회개한 신자가 침례를 받는 물속에 죽음을 경험하기 전까지는 죄를 용서받지 못한 상태로 남아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로마서 6:4). 그러나 많은 교파들은 이러한 성경 해석에 동의하지 않으며, 사람이 물세례(침례) 이전에, 그리고 침례 없이 오직 “믿음”의 시점에 구원받는다고 주장합니다. 구원에 있어 침례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축소하기 위해 제기되는 몇 가지 주요 반론들을 살펴보겠습니다.

반론 #1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기에 죄 사함을 위해 세례를 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사람들도 죄를 용서받기 위해 세례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예수님의 모범을 따르는 것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세례는 요한의 세례였습니다(마태복음 3:13; 마가복음 1:9). 요한의 세례는 죄 사함을 위한 것이었습니다(마가복음 1:4; 누가복음 3:3). 이 사실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러 나오셨을 때 요한이 말리고자 했던 점에서도 명백히 드러납니다. 요한은 오히려 자신이 예수님께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마태복음 3:14). 예수님은 오늘날 많은 이들이 잘못 주장하는 것처럼 “세례가 죄 사함을 위한 것이 아니다”라고 요한을 정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요한의 말에 동의하시면서도, 자신의 세례는 이 규칙의 예외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독특했으며 다른 누구의 세례와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모든 의를 이루는”(마태복음 3:15) 독특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요한의 세례에 순종하신 것은(1)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일에 예외가 없음을 동시대 사람들에게 보이시기 위함이었고,(2) 더 구체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세례가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의 정체를 세상에 알리시는 수단이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성령이 예수님 위에 임하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라는 음성을 들었을 때 비로소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요한복음 1:31-34; 마태복음 3:16-17).

         물론, 요한의 세례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습니다(사도행전 18:24-19:5). 요한의 세례는 죄 사함을 위한다는 점에서는 신약의 세례와 평행을 이루지만, 유대인들을 메시아께로 준비시키는 과도기적 성격을 띠고 있었습니다. 십자가 이후의 세례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며(마태복음 28:19), 예수님의 이름으로(누가복음 24:47; 사도행전 2:38; 19:5), 그분의 죽으심과 합하여(로마서 6:3), 그리스도로 옷 입고(갈라디아서 3:27), 그분의 교회에 더해지기 위한 것입니다(사도행전 2:47; 고린도전서 12:13). 구원이 침례(세례) 이전에 일어난다고 주장하기 위해 예수님의 세례를 이용해서는 안 됩니다.

반론 #2

십자가의 강도는 세례를 받지 않았지만 구원을 받았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디모데후서 2:15)한다면, 우리는 그 강도가 신약의 침례 명령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명령은 강도가 죽은 후에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에 비로소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마가복음 16:1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이 폐지된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 때였으며, 이는 성전 휘장이 찢어짐으로 상징되었습니다(마태복음 27:51). 예수님께서 죽으셨을 때, 그분은 구약 율법을 “십자가에 못 박아” 제하셨습니다(골로새서 2:14).

         ‘Testament’이라는 단어는 “언약” 또는 “유언장”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지막 유언이자 언약은 신약이며, 이는 그리스도의 죽음 이후의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가르침들로 구성됩니다. 우리가 신약의 혜택(구원, 죄 사함, 영생)을 받으려면, 그리스도께서 중보자가 되시는 그 유언(언약)의 조건을 따라야 합니다.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유효한즉 유언한 자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효력이 없느니라”(히브리서 9:16-17).

         따라서 주님의 죽으심과 신약의 인준 이전에는, 십자가 이후에 효력을 발휘할 ‘죄 사함을 위한 세례’가 하나님께 인정받기 위한 요구 사항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지상에 계실 때 죄를 사하는 권세를 행사하셨습니다(마태복음 9:6). 그러나 지금 우리는 종교사적으로 기독교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 이전에는 그리스도인이 없었습니다(사도행전 11:26). 십자가의 강도가 무엇을 했고 안 했고를 근거로 물세례가 구원의 필수 조건임을 거부하는 것은, 마치 노아가 방주를 지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으니 아브라함도 방주를 지어 구원받으려 하는 것과 같습니다. 혹은 부자 청년 관원에게 소유를 팔라고 하신 명령(마태복음 19장)을 거부하면서, 부유했던 다윗 왕은 소유를 팔지 않고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고 핑계 대는 것과 같습니다.

         십자가의 강도는 오늘날 우리에게 규정된 신약의 세례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로마서 6:3-4은 우리가 “새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고, 세례와 함께 장사지낸 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야 한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강도는 이 신약의 세례를 따를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아직 죽지 않으셨고, 장사되지 않으셨으며, 부활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디모데후서 2:10)과 그분의 몸인 교회(사도행전 2:47; 에베소서 1:22-23)에 관한 하나님의 제정된 가르침 중 어떤 것도 아직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교회(사도행전 20:28)는 아직 세워지지 않았으며, 몇 주 후(사도행전 2장)에야 세워졌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강도를 구원의 본보기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대신 우리는 “교훈의 본”(로마서 6:17), 즉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죽음, 장사, 부활의 형상을 “마음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될” 수 있습니다(로마서 6:18).

반론 #3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네 마음 문 밖에 서 계신다’고 말합니다. 죄를 용서받고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분을 우리 마음속에 초청하는 것뿐입니다.

         놀랍게도 성경에는 그런 말씀이 없습니다. 이 표현은 보통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인용되는 요한계시록 3:20을 연상시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3:20이 실제로 무엇을 가르치는지 살펴보십시오.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은 1세기에 소아시아에 있던 일곱 개의 그리스도의 교회에 보내는 구체적인 메시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요한계시록 3:20이 기독교로 개종하려는 비신자가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인들에게 하신 말씀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둘째, 요한계시록 3:20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하신 말씀 중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교회가 잃어버린 상태로 전락했음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들은 “미지근하여”(3:16) 하나님께 용납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영적 상태가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여”(3:17) 구원받지 못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매우 실제적인 의미에서 예수님은 그들 가운데서 자신의 임재를 거두심으로 그들을 떠나셨습니다. 이제 그분은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고 계신 것입니다. 그분은 여전히 그들 가운데 계시기를 원하셨지만, 결정은 그들에게 달려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분의 부재를 인식하고, 들어오시려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문을 열어야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들이 회개해야 함을 나타내는 비유적 언어입니다(3:19).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순종의 삶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요한복음 14:21, 23).

         요한계시록 3:20은 결코 비신자가 단순히 “마음 문을 열고” “예수님을 초청”하면, 그 즉시 예수님이 마음속에 들어오시고 모든 과거의 죄에서 구원받아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사상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이 구절의 문맥은 예수님께서 배교한 교회에 다시 들어가기를 구하고 계심을 보여줍니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마음에 들어오신다고 가르칩니까?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일반 종교관이 제시하는 방식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에베소서 3:17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계시게 한다고 말합니다. 믿음은 오직 성경의 진리를 들음으로써만 얻을 수 있습니다(로마서 10:17). 성경 진리에 순종할 때, 그 사람은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히브리서 5:9; 야고보서 2:22; 베드로전서 1:22).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즉, 회개], 몸은 정결한 물로 씻음을 받았을 때[즉, 세례]” 우리 삶에 들어오십니다(히브리서 10:22).

반론 #4

사람은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로 영접하는 순간 구원받습니다. 이는 물세례보다 선행하며, 따라서 물세례는 구원의 조건에서 제외됩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해야 할 일이 오직 마음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입으로 시인하는 것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마태복음 7:21에 있는 예수님의 선언을 반박하는 것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물론 그리스도를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구원의 전제 조건 중 하나입니다(로마서 10:10). 그러나 예수님은 그분의 피로 사신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입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나 “내면적으로 그분을 구세주로 영접하는 것”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스스로를 하나님의 자녀(그리스도인)라고 여기기 전에, 외적인 순종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을 통해 그분의 선물을 받아들임을 보여야 한다고 명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대조하신 중요한 차이점을 주목하십시오. 주님을 따르겠다는 정신적/언어적 결심과, 행동이나 순종이 결합된 언어적 고백의 차이입니다(야고보서 2:14, 17 참조). 이것이 바로 우리가 구원 이전에 주님께서 지시하신 모든 것을 행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이 하라고 명백히 말씀하신 것을 행하지 않고도 주님을 찾았다고 주장하는 실수를 범할 수 있다고 경고하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한복음 3:5). 또한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마가복음 16:16)고 하셨습니다. 정직하게 묻습니다. 당신은 예수님을 그분이 말씀하신 방식대로 개인의 구세주로 영접했습니까? 그분은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누가복음 6:46).

반론 #5

우리가 그분을 믿을 때 그리스도로 옷 입고 그분의 자녀가 됩니다.

         갈라디아서 3:26-27을 읽어보십시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여기서 “옷 입다”라는 말은 그리스어 동사 enduo의 번역으로 “안으로 들어가다, 옷을 입듯이 입다”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기” 전에, 혹은 그리스도를 “입기” 전에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물론 없습니다. 바울에 따르면 언제, 어떻게 그리스도로 옷 입게 됩니까? 물세례를 받을 때입니다. 세례 이전에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은 사실상 우리가 영적으로 벌거벗은 상태로, 그리스도 없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셈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세례를 받는 시점에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고 확언합니다. 그 이전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이 말을 썼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어느 시점에 그들이 그리스도로 옷 입었습니까? 언제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습니까? 언제 구원받았습니까? 바울은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매우 명확히 합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그리스도를 입고, 그리스도로 옷 입게 된 것은 그들이 세례를 받았을 때입니다. 구원하는 믿음은 세례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세례를 포함합니다. 당신이 그리스도로 옷 입었는지 자문해 보십시오.

반론 #6

세례는 군복의 훈장처럼 그 사람이 이미 구원받았다는 증거를 보여주는 것일 뿐입니다.

         신약성경 어디에도 세례가 단순히 “훈장”이라거나 “내적 은혜의 외적 표징”이라는 사상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세례는 성경적으로 상징적인 행위로 언급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무엇을 상징합니까? 이미 받은 용서입니까? 아닙니다! 로마서 6:3-4은 세례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 지냄과 부활을 상징(또는 모방)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그것은 세례 이후에(이전이 아니라) 따르는 새 생명에 대한 부인할 수 없는 언급입니다.

반론 #7

세례는 공로를 쌓는 행위(work)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행위가 아닌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구원의 “행위”나 “단계”가 그 행동을 순종함으로써 구원을 “벌어들이는(merit)”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단계”나 “과정”은 성경적인 개념인 전제 조건, 믿음의 규정, 또는 순종의 행위들을 의미합니다. 야고보는 이것을 “행함”이라고 불렀습니다(야고보서 2:17). 야고보는 사람이 자신의 의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야고보서 2:24). 오히려 그는 구원하는 믿음의 능동적인 본질을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죽어서 쓸모없는 믿음(2:20)과 대조되는 ‘살아있는 믿음’, 즉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행동에 순종하는 믿음만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유일한 믿음임을 보여주었습니다. 아브라함과 라합의 순종은 야고보가 말하는 ‘받으실 만한 믿음’의 예시로 제시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능동적으로 행함으로써 신뢰를 나타냈습니다. 그러한 순종적이고 능동적인 신뢰만이 효력이 있습니다. 따라서 순종적인 반응은 필수적입니다.

         행동 그 자체가 의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행동은 의롭게 하는 신뢰(믿음)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야고보에 따르면, 이 둘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조건에 순종하도록 이끌지 않는 신뢰나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적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과 종교개혁가들의 부정적 영향을 받은 사람들을 구분하는 구원의 핵심입니다. 개혁가들은 나쁜 행위를 좋은 행위로 상쇄하여 구원을 얻으려는 비성경적 개념에 반발했습니다. 안타깝게도 반동적인 개혁가들은 “오직 믿음”이라거나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똑같이 용납될 수 없는 반대 극단으로 치우쳤습니다. 진리는 이 두 비성경적 극단 사이에 있습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믿음은 하나님께서 제공하시는 것에 대해 인간이 나타내는 신뢰하고 순종하는 반응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로마서에서 설명한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영감 받은 논문의 시작(1:5)과 끝(16:26)에 붉은 깃발처럼 “믿음의 순종”(obedient faith)이라는 단어로 자신이 의미하는 “믿음”을 정의했습니다. 즉, 순종하는 믿음,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순종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이행하시겠다고 선언하신 이유입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 하였음이라”(창세기 26:5).

반론 #8

세례가 구원에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믿음조차도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인간은 너무 타락하여 스스로 믿을 수조차 없습니다.

         확실히, 하나님의 무한하신 정의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원하도록 강요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인간의 비참한 상태에 대한 하나님의 개입은 인간이 도움을 원하게 만들거나 기적적으로 인간 내면에 믿음을 생성시키는 형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영감 받은 말씀을 인간에게 주심으로 개입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인간이 영원한 재앙을 피할 길을 만들기 위해 그분이 어떻게 아들을 주셨는지를 말해줍니다. 믿음은 개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이해할 때 그 안에서 생성됩니다(로마서 10:17; 사도행전 8:30). 그런 다음 개인은 순종으로 자신의 믿음을 증명합니다.

         여리고 성벽은 “믿음으로” 무너졌습니까(히브리서 11:30)? 물론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질문은 “언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단지 무너질 것이라고 “믿었던” 순간에 무너졌습니까? 아닙니다! 백성이 하나님의 지시에 순종했을 때입니다. 성벽은 백성이 하나님의 조건을 충족시킨 후에 “믿음으로” 무너졌습니다. 조건을 충족하지 않았다면 성벽은 “믿음으로” 무너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의 노력으로 성벽을 무너뜨렸다거나 성벽의 붕괴를 벌었다고 주장할 수 없었습니다. 그 성은 하나님의 은혜의 과분한 선물로 그들에게 주어졌습니다(여호수아 6:2). 그 성을 거저 받기 위해 백성은 하나님이 규정하신 전제 조건에 순종해야 했습니다.

         히브리서 11:6가 말하는 본질에 주목하십시오. 믿음이나 신념은 하나님께서 주입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인간이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전체는 인간이 순종적인 신뢰를 발휘할 개인적 책임이 있다는 근본적인 사상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부르심으로 인간을 중생시켜 응답하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수단으로 개인들을 “부르십니다”(데살로니가후서 2:14). 그리고 그 기록된 말씀이 개인 안에 믿음을 생성시킵니다(로마서 10:17). 인간이 너무나 “전적으로 타락”하여 믿을 수조차 없다고 제안하는 것은 얼마나 비성경적입니까?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이 본질적으로 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시는(요한복음 8:24) 불의한 분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반론 #9

사도행전 2:38의 ‘죄 사함을 얻게 하고(for the remission of sins)’에서 전치사’for’는 ‘~때문에(because of)’를 의미합니다. 즉, 그들은 믿었을 때 이미 용서받은 죄들 ‘때문에’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영어 단어 “for”는 “~때문에”라는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어 “for”의 기초가 되는 그리스어 전치사 eis는 결코 원인(causal) 기능을 갖지 않습니다. 그것은 항상 1차적이고 기본적인 목적격 방향성, 즉 “~을 향하여(unto, into, to, toward)”를 가집니다. 우리는 텍스트에 접근할 때 우리가 생각하는 의미를 결정해 놓고, 선입견과 일치하는 문법적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영감 받은 문법에서 시작하여 문법적, 어휘적 구조의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의미에 비추어 모든 텍스트를 이해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2:38과 동일한 문법적 구조가 마태복음 26:28에서 발견됩니다.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into the remission of sins; eis aphesin hamartion)”. 언약의 피인 예수님의 피는 부인할 수 없이 많은 사람을 위해 “죄 사함을 얻게 하기 위하여” 흘려졌습니다. 이것이 그리스어 전치사의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의미, 즉 “~을 향하여”, “~의 방향으로”입니다. 만약 성령께서 세례가 과거의 용서 “때문에” 또는 “그것에 기인하여”라고 말하고자 하셨다면, 바로 그 개념을 전달하는 그리스어 전치사 dia(목적격과 함께 쓰일 때)를 사용하셨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도행전 2:38에서 회개가 죄 사함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면, 세례 또한 그렇지 않습니다. 인칭과 수에 관계없이 베드로는 청중들에게 두 가지(회개와 세례)를 다 하라고 말했습니다. 세례 행위(등위 접속사로 회개 행위와 연결됨)는 어떤 경우에도 죄 사함의 문맥에서 분리될 수 없습니다.

반론 #10

빌립보 간수가 구원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단순히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말만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사람에게 기적적으로 믿음을 부여하지 않으신다는 또 다른 증거로, 바울이 간수에게 믿어야 한다고 말했다는 점을 주목하십시오. 바울은 “당신은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실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바울과 실라는 그가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나타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 이방인 간수가 그 순간 그렇게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무엇을, 어떻게, 누구를 믿어야 하는지 가르침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누가는 즉시 기록하기를 “주의 말씀을 그에게… 전하더라”(사도행전 16:32)고 했습니다. 로마서 10:17을 신뢰한다면, 바울과 실라가 선포한 그 말씀이 간수 안에 믿음을 생성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는 분명히 회개와 세례의 필요성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간수는 즉시 회개의 열매를 맺었고 마찬가지로 즉시 세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간수가 믿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후에야 비로소 기뻐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는 누가의 세심한 기록을 주의 깊게 보십시오. 그때서야 누가는 간수를 “하나님을 믿는 자”(34절), 즉 온전한 믿음의 상태에 있는 자로 묘사했습니다.(5)

반론 #11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이 나타나셨을 때 세례 이전에, 그리고 세례 없이 구원받았습니다.

         사도행전에 묘사된 실제 사건의 순서는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구원받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밝히시고 사울이 박해자임을 지적하셨습니다(사도행전 9:5). 사울은 “떨며” “놀랐습니다”(구원받은 사람에 대한 묘사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할지 간청하며 물었습니다. 이는 그가 자신의 잃어버린 상태와 절망적인 처지를 막 깨달었음을 보여주는 분명한 표시입니다.

         이 질문은 오순절 사람들의 질문(사도행전 2:37) 및 간수의 질문(사도행전 16:30)과 정확히 같은 효력을 가집니다. 세 구절 모두 잘못을 저지른 개인들의 특성을 유사하게 묘사합니다(오순절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고, 사울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으며, 간수는 무고한 그리스도인들을 가두었습니다). 또한, 각 경우에 개종 후보자들은 불행한 상태로 묘사됩니다(오순절 사람들은 “마음에 찔려”, 사울은 “떨며 놀라”, 간수는 “무서워 떨며”). 그들은 갑자기 하나님 앞에서의 끔찍하고 용납될 수 없는 자신의 상태를 직면하게 된, 두려움에 떨고 비참한 개인들이었습니다. 이것은 구원받은 사람들에 대한 적절한 묘사가 아닙니다. 죄 씻음을 받았을 때 오는 기쁨과 평화, 흥분은 어디에 있습니까?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용서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여전히 그가 “해야할 것”을 들어야 했습니다(사도행전 9:6). 그는 아직 “주의 말씀을 듣는 것”이 부족했습니다. 사울이 복음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설교자를 통한 것이었습니다(로마서 10:14; 고린도전서 1:21). 마찬가지로 천사가 고넬료에게 그의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었다고 말했을 때도(사도행전 10:4), 그는 아직 구원받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는 영감 받은 설교자 베드로를 만나야 했습니다. 베드로는 “너와 네 온 집이 구원받을 말씀”(사도행전 11:14)을 전해줄 사람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울이 위대한 “이방인의 사도”가 되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알기 전에, 그는 먼저 복음 설명을 듣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제공하시는 것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들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사울에게 구원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직접 말씀하시는 대신, 성으로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그곳에서 설교자(아나니아)가 구원의 필요성을 설명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목하십시오! 사울은 다메섹에서 3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여전히 눈이 먼 상태로 기다렸습니다. 여기 자신의 불행한 상태를 어떻게 바꿀지 지시를 기다리는, 여전히 비참하고 불행하며 구원받지 못한 한 사람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9:18은 선포된 말씀에 대한 사울의 반응을 요약하고 있으며, 사도행전 22장은 사울의 반응의 중요성에 대해 더 자세히 설명합니다. 아나니아는 말했습니다. “이제는 왜 주저하느냐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사도행전 22:16).

         아나니아가 영감 가운데 세례와 죄 씻음을 연결한 것을 주목하십시오. 만약 사울이 세례 이전에 구원받았다면,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씻어야 할 죄가 여전히 있다고 말한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의 죄가 이미 씻겨졌다고 축하하거나,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훈장”이나 “외적 상징” 또는 “그림”으로서만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분명히 사울의 죄가 아직 씻겨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오직 세례 행위 속에서 예수님의 피로만 성취될 수 있습니다. 물이 죄로 얼룩진 영혼을 씻어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십니다. 그리고 아나니아는 그것이 일어나는 시점을 명확히 진술했습니다. 만약 사울의 회개하는 믿음이 그를 물세례에 순종하도록 이끌지 않았다면, 그는 예수님에 의해 죄 씻음을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대신 그는 예수님을 대적하는 상태로 남았을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성경은 결코 세례를 과거의 죄 제거에 대한 상징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세례에 부여된 유일한 상징성은 (1) 예수님의 죽음, 장사, 부활과의 유사성(로마서 6:3-5), (2) 할례가 피부를 제거하는 것과 같은 죄의 제거와의 비교(골로새서 2:12), (3) 노아가 죄악 된 세상에서 빠져나온 것과의 유사성(베드로전서 3:20-21)입니다. 하나님은 세례의 시점에, 은혜로, 믿음을 통해, 문자 그대로(상징적으로가 아니라) 죄를 제거하시고 우리를 의롭게 하십니다.

반론 #12

세례가 구원에 필요하다면, 예수님은 마가복음 16:16에서 ‘믿지 않고 세례를 받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라고 말씀하셨어야 합니다. 게다가 마가복음 16장의 마지막 12구절은 가장 오래되고 좋은 그리스어 사본들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마가복음 16:16에서 “세례를 받지 않고”가 생략된 것은 전적으로 논리적이고 필연적입니다. 첫 번째 구절(“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은 복음 선포에 의해 요구되는 인간의 완전한 반응을 묘사합니다. 믿음은 세례보다 선행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먼저 믿지 않는다면 당연히 세례에 순종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절에서 세례를 받지 않는 사람에게 정죄를 돌리는 것은 불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정죄받는 대상은 애초에 믿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벌써 심판을 받은”(요한복음 3:18) 것이며, 당연히 다음 순종 단계인 세례에 관심을 갖지 않을 것입니다. 믿지 않는 자는 당연히 세례를 받지 않을 것이며, 설령 받는다 해도 먼저 믿지 않았기 때문에 세례의 자격이 없습니다. 오직 회개한 신자만이 세례의 대상자입니다. 정확한 문법적 비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가게에 가서 아빠를 위해 커피를 사 오는 사람은 5달러를 받을 것이다. 가게에 가지 않는 사람은 매를 맞을 것이다.” 명백히, 아이가 가게에 가기를 거부한다면 커피를 살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으며, 다가올 매를 선언하는 데 커피를 사지 않은 실패를 포함하는 것은 문법적으로나 언어적으로 중복이며 부적절합니다.

         마가복음 16장의 마지막 구절들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지 않은 것입니까? 원문을 확정하기 위해 활용 가능한 방대한 자료들을 고려할 때, 마가복음 16장 9절에서 20절의 진정성을 지지하는 사본학적 증거는 매우 탁월합니다. 바티칸 사본과 시내 사본이 마지막 12구절을 생략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구절들의 타당성이 약하다”고 가정하는 것은 명백한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사실, 압도적으로 많은 수의 증거 사본들이 9절에서 20절의 진정성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바티칸 사본의 배제는 목회 서신, 히브리서 뒷부분, 요한계시록을 비슷하게 배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무게가 떨어집니다. 시내 사본의 배제 역시 외경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집니다.(6)

반론 #13

로마서 10:9-10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예수님을 믿고 시인하는 것뿐임을 나타냅니다.

         로마서 10:10에서 eis의 사용은 “~때문에”를 의미할 수 없습니다. 9절은 사람이 “만일” 입으로 시인하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고 명시적으로 말합니다. 그러므로 고백과 믿음은 용서의 전제 조건입니다. 그것들은 선포된 말씀(8절)에 대한 하나님이 정하신 “반응”이며, 하나님에 의해 구원이 부여되기 전에 일어나야 합니다. 다시 말해, 진리에 순종할 때 영혼이 깨끗해집니다(베드로전서 1:22). 예수님은 자기에게 순종하는 자들에게 영원한 구원을 주십니다(히브리서 5:9).

그러나 로마서 10:9-10에 믿음과 고백만 언급되어 있으므로 세례는 구원에서 제외됩니까? 주목하십시오. 네 장 앞선 로마서 6:17-18의 순서를 보십시오: (1) 죄의 종, (2) 사람이 순종함, (3) 죄로부터 해방됨(의로워짐). (3) 항목은 (2) 항목이 먼저 일어나지 않으면 발생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본분”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들을 지키는 것입니다(전도서 12:13). 하나님은 누구에게 성령을 주십니까? 개인의 필수적인 반응에 대한 고려 없이 임의로 선택한 자들에게 주십니까? 아닙니다. 사도행전 5:32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다고 말합니다.

         로마서 10장에서 세례가 언급되지 않았다고 해서 구원에 필수적이지 않다는 주장은 로마서 10장 이외의 다른 구절에서 반박되어야 합니다. 로마서 10:10에 회개가 언급되지 않았다고 해서 회개가 불필요합니까? 아닙니다. 2장 4절에서 회개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 특정 본문에 언급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세례를 비본질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왜입니까? 세례는 6장 3-4절에서 명령되고 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세례의 중요성을 확인하려면, 믿음에 관한 구절을 존중하여 세례를 무시할 것이 아니라, 그 주제를 논의하는 구절들로 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이 구원한다”(로마서 5:1)고 말씀하시면 그 진리를 받아들입시다. 하나님께서 “세례가 구원한다”(베드로전서 3:21)고 말씀하시면 그 진리 또한 받아들입시다! 예수님 자신이 말씀하셨습니다: 믿음 + 세례 = 구원(마가복음 16:16). 믿음 = 구원 + 세례가 아닙니다.

         또한 주목하십시오. 로마서 10:10, 13은 구원이 단순한 영접기도(예: “나는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받아들입니다”)으로 얻어진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1) 성경 어디에도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라”는 문구는 없습니다.(2) 예수님은 마태복음 7:21과 누가복음 6:46에서 입술의 고백만으로는 용납될 수 없음을 보여주심으로써 정신적 수용/언어적 공언만으로 구원받는다는 생각을 영원히 깨뜨리셨습니다. 모든 시대에 하나님께서 개인을 기쁘게 여기거나 받아들이시기 전에 요구하신 구체적인 순종의 행위들이 있었습니다. 사실, 믿음이 적절한 순종 행위(세례와 같은)와 결합되지 않으면, 그러한 믿음은 의롭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 믿음은 불완전하며(야고보서 2:17, 20, 26) 따라서 구원할 수 없습니다!(3) “주의 이름을 부르라”는 구절은 “적절한 순종의 행위로 반응하라”는 관용적 표현입니다. 이는 제유법(synecdoche, 부분이 전체를 나타내는 수사법)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그분이 하라고 하신 것을 하라”는 말과 같습니다. 이사야 55:6은 이사야 시대의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을 부르라고 말했습니다. 7절은 방법을 설명합니다: (1) 악한 길을 버리고, (2) 악한 생각을 버리고, (3)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이 세 가지 규정을 따르는 것이 “하나님을 부르는 것”을 구성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루살렘에서 “주의 이름을 부른” 자들(사도행전 9:14, 21)은 단순히 입술의 고백으로 한 것이 아니라, 회개와 죄 사함을 위한 세례로(사도행전 2:38) 그렇게 했습니다. 바울 자신도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즉 “주의 이름을 불렀을 때”, 입으로만 그리스도를 시인한 것이 아니라 세례를 받음으로써(사도행전 22:16) 그렇게 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세례를 받는 것과 동등한(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세례 시점에 예수님의 피로 그의 죄를 씻어 주셨습니다.

결론

         비록 기독교계의 많은 부분이 수세기 동안 칼빈주의와 1세기 이후의 신학적 사상으로 빗나가긴 했지만, 세례의 의미와 설계는 신약성경에 의해 결정됩니다. 세례에 대해 말하는 신약성경 구절들은 확정적입니다. 그 구절들은 믿음, 회개,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고백과 더불어 물세례(침례)가 구원에 선행함을 나타냅니다. 어떤 반론도 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기능을 뒤집지 못했습니다.

각주 및 참고문헌

1. Although the thief may well have submitted to the precursor to NT baptism, i.e., John’s baptism, it also was “for the remission of sins” (Mark 1:4; Luke 3:3).

2 See also Dave Miller (2003), “The Thief on the Cross,” Apologetics Press, https://www.apologeticspress.org/APContent.aspx?category=11&article=1274&topic=86.

3 Cf. Eric Lyons (2004), “Calling on the Name of the Lord,” https://www.apologeticspress.org/articles/597.

4 Rudolf Bultmann (1968), “πιστεύω,”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Eerdmans, 1982 reprint), 6:206; Fredrick William Danker (2000), “ὑπακοη,”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Chicago, IL: University of Chicago), third edition, p. 1028; James Denny (no date), “St. Paul’s Epistles to the Romans” in The Expositor’s Greek Testament, ed. W. Robertson Nicoll (Grand Rapids, MI: Eerdmans), 2:587; J.B. Lightfoot (1895), Notes on Epistles of St. Paul (London: Macmillan), p. 246; H.P.V. Nunn (1912), A Short Syntax of New Testament Greek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p. 42; Geoffrey H. Parke-Taylor (1944), “A Note on ‘είς ὑπακοὴν πίστεως’ in Romans 1.5 and xvi.26,” The Expository Times, 55:305-306; A.T. Robertson (1931), Word Pictures in the New Testament (Nashville, TN: Broadman Press), 4:324; Marvin Vincent (1946), Word Studies i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Eerdmans), 3:5; W.E. Vine (1966), An Expository Dictionary of New Testament Words (Old Tappan, NJ: Fleming H. Revell), p. 123.

5 W.M. Ramsay (1915), The Bearing of Recent Discovery on the Trustworthiness of the New Testament (London: Houghton and Stoughton), p. 165.

6 For a more thorough discussion of this matter, see Dave Miller (2005), “Is Mark 16:9-20 Inspired?” Reason & Revelation, 25[12]:89-95, December, https://www.apologeticspress.org/articles/2780.


Published

A copied sheet of paper

REPRODUCTION & DISCLAIMERS: We are happy to grant permission for this article to be reproduced in part or in its entirety, as long as our stipulations are observed.

Reproduction Stipulati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