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침례)를 이해하기
어떤 종교인들이 구원을 위해 물세례(침례)가 필수적 전제 조건이라고 느끼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그것이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은 죄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풍성한 하늘의 복을 받기 위해 물에 잠겨야(immersed) 한다고 요구하시는 것입니까(갈라디아서 3:27; 사도행전 2:38; 8:34-40; 디모데후서 2:10; 골로새서 1:14)? 그들은 “세례의 필요성은 너무 자의적으로 보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고백하는 것은 이치에 맞습니다. 죄를 회개하는 것도 논리적입니다. 하지만 세례가 무슨 소용입니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리고 왜 몸이 물에 젖는 것이 영적으로 깨끗해지게 만듭니까?”
첫째, 하나님의 지시가 우리에게 합리적으로 보이든 그렇지 않든, 하나님은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기를 기대하십니다. 구약을 연구하면서 배우는 많은 교훈 중 하나는 하나님께서 종종 인간에게 다소 비논리적으로 보이는 명령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하나님은 모세에게 물을 얻기 위해 반석을 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출애굽기 17:1-7). 우물을 파는 것이 더 합리적으로 보였겠지만, 하나님은 모세가 반석에서 물을 얻기 전에 지팡이로 반석을 치기를 원하셨습니다. 40년 후 이스라엘이 가나안 정복을 시작할 때, 여호와께서는 그 성을 정복하기 위해 여리고 성을 하루에 한 번씩 6일 동안 돌고, 7일째에는 일곱 번 돌라고 지시하셨습니다(여호수아 6:1-5).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일곱째 날에 “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길게 불어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6:5). 단순히 성을 걷고, 소리 지르고, 나팔을 부는 것으로 적을 물리친다는 생각은 비이성적으로 보입니다. 일반 사람에게는 말이 안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이 승리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에게 요구하신 것이었습니다. 수백 년 후,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사는 나병 환자 나아만에게 병을 고치기 위해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고 지시했습니다(열왕기하 5:10). 요단강 물에 치유 능력이 없음을 고려할 때, 이 명령은 당시 나아만에게도 거의 이치에 맞지 않았으며, 오늘날 일부 성경 독자들에게도 그리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나병 환자가 강물에 몸을 담그기를 원하셨을까요? 그리고 왜 하필 일곱 번입니까? 강물에 무슨 약효가 있었습니까? 왜 선지자가 단순히 나아만에게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오늘날, 만약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승리”(고린도전서 15:57)를 얻고자 한다면 성경은 명확합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고 죄를 회개하는 것 외에도(요한복음 8:24; 로마서 10:9-10; 누가복음 13:3; 사도행전 2:38), 그는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마가복음 16:16; 베드로전서 3:21). 단지 세례와 영원한 구원이 전혀 무관하다고 느껴진다는 이유로 물에 잠기라는 명령을 거부하는 것은, 과거 모세나 이스라엘 백성, 그리고 나아만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한 것만큼이나 잘못된 일입니다(참조: 이사야 55:8-9).
그러나 사실 물에 잠기는 것(침례)은 일부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비논리적인 지시”가 아닙니다.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과 구원을 받아들이는 조건들(세례를 포함하여)은 “창세 전에”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었습니다(에베소서 1:4).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취하신” 이 계획을 항상 알고 계셨습니다(에베소서 3:11). 세례를 경박하고 일시적인 의식으로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세례는 첫째, 하나님께서 그렇다고 말씀하셨기에 의미가 있습니다. 둘째, 세례를 논하는 구절들을 시간을 내어 살펴보면 그 중요성을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나아만이 요단강 물 자체에 나병 치유 능력이 있다고 믿기를 하나님께서 기대하지 않으셨던 것처럼, 죄 사함의 능력이 물 자체에 있다고 생각하도록 의도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이 문제에 대해 매우 명확히 하여, 세례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베드로전서 3:21)라고 기록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들에 편지하며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라디아서 3:27, 강조 추가)고 했습니다. 이 구절이 로마서 6:3 이하와 결합될 때, 우리는 그리스도 안으로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분의 죽으심 안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을 배웁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로마서 6:3-7).
“왜 세례인가?”라고 묻기보다, 어쩌면 우리는 “왜 안 되는가?”라고 물어야 할 것입니다. 죄의 삶이 완전히 끝남을 이보다 더 적절하게 나타낼 행위가 무엇이겠습니까? R.L. 화이트사이드(R.L. Whiteside)는 로마서 6장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관찰했습니다.
“세례 안에 장사됨에는 그분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이 있습니다. 또한 세례에서 새 생명으로 일으키심을 받음에는 그분의 부활과 같은 모양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음으로써 우리는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 같은 모양으로 그분과 연합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죽음에서 그분과 함께한 자요, 또한 새 생명으로 일으키심을 받는 일에도 함께한 자입니다. 예수님은 장사되셨고 새 생명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세례로 장사되고 새 생명으로 일어납니다. 이 구절들은 세례의 행위뿐만 아니라 그 영적 가치도 보여줍니다.”(1)
세례 행위 안에서 십자가는 죄인에게 실체화(actualized)되며, 개인적인 의미를 갖게 됩니다.(2)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될 때마다, 죄인은 죽고(“세례로 그와 함께 장사되고”-골로새서 2:12),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예수]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골로새서 2:12) 성도로 일으키심을 받습니다.
진실로, 우리를 위해 생명을 주신 분과 함께 새 생명을 시작하기 위한 세례의 방식에 초점을 맞춘다면, 세례는 “이치에 맞습니다”(완벽하게 말이 됩니다)(마태복음 28:18-20). 노아의 새 생명이 물을 통해(by water) 죄악 된 세상에서 옮겨진 후 시작된 것처럼(베드로전서 3:21; 참조 고린도후서 5:17), 죄인은 물을 통해 그리스도의 죽음, 장사, 부활로 옮겨집니다. 이 순종적인 행위는 우리를 세상 밖으로 안내하고 하나님과의 관계 안으로 인도합니다.
각주
1. Riley, Tom (2000), Dying to Live Again (Webb City, MO: Covenant Publishing).
2. Whiteside, Robertson L. (1988), Paul’s Letter to the Saints at Rome (Bowling Green, KY: Guardian of Truth Foundation), repri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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